팀에서 가장 일 잘하는 개발자에게 “다음 달부터 팀장 맡아”라고 했던 적 있으신가요?
그 개발자가 팀장이 된 이후, 팀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지고, 본인도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으실 겁니다. 코드를 작성할 때는 누구보다 빛나던 사람이, 회의를 주재하고 성과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는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것이죠. 이건 그 사람의 능력 부족이 아닙니다. 역할이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실무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는 사람이 반드시 좋은 관리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최고의 기술자를 무턱대고 관리자로 승진시키면 안 되는지, 그리고 조직이 어떻게 ‘투 트랙(듀얼 커리어 트랙)’ 구조를 설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승진 = 관리자”라는 공식이 만드는 함정
한국의 많은 조직에서는 승진의 경로가 하나뿐입니다. 사원에서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임원으로 올라가는 수직적 구조 말입니다. 이 구조에서 승진이란 곧 ‘사람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코딩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 1:1 면담을 잘하고, 팀원의 성과를 평가하고, 채용 면접을 리드하는 능력도 탁월할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1969년 로렌스 피터(Laurence J. Peter) 교수가 제시한 ‘피터의 원리(Peter Principle)’는 이 문제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위계 조직에서 구성원은 현재 직무의 성과를 기반으로 승진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직책에 도달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이론이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실제 데이터로 검증되었다는 점입니다.
연구가 증명하는 불편한 진실
예일대학교의 켈리 슈(Kelly Shue) 교수와 앨런 벤슨(Alan Benson), 다니엘 리(Danielle Li) 교수가 2019년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에 발표한 연구는 약 4만 명의 영업 직원 데이터를 131개 기업에서 수집해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상당히 명확했습니다.
개인 영업 실적이 뛰어난 직원일수록 승진 확률이 높았지만, 이들이 관리자가 된 후에는 오히려 팀의 실적이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 것입니다. 반면, 동료와의 협업 경험이 풍부한 직원은 관리자로서 더 높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업들이 ‘가장 일 잘하는 사람’을 승진시키고 있었지 ‘가장 관리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승진시키고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연구는 풍자로 시작된 피터의 원리가 현실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대규모 데이터로 보여준 첫 번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듀얼 커리어 트랙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의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듀얼 커리어 트랙(Dual Career Track)입니다. 관리자(Management) 트랙과 실무 전문가(Individual Contributor, IC) 트랙을 평행하게 운영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 개념은 사실 꽤 오래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화학 기업 듀폰(DuPont)이 처음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수한 R&D 과학자들이 관리직으로 전환되면서 연구 역량이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3M, IBM, GE 같은 기업들이 이를 벤치마킹했고,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들에서는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두 트랙의 핵심 차이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관리자 트랙은 팀 빌딩, 성과 관리, 채용, 인재 양성에 집중합니다. 측정 기준은 팀원의 성장과 조직 전체의 아웃풋이고, Engineering Manager → Director → VP 같은 직책으로 이어집니다.
전문가(IC) 트랙은 기술적 난제 해결, 시스템 설계, 도메인 전문성 확산에 집중합니다. 측정 기준은 기술적 영향력과 독립적 문제 해결 능력이며, Staff Engineer → Principal Engineer → Fellow 같은 직책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건, 이 두 트랙이 위아래 관계가 아니라 같은 높이의 평행선이라는 점입니다. 같은 레벨의 관리자와 전문가는 동일한 보상과 대우를 받습니다.
실리콘밸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드롭박스: ‘영향력’으로 평가하기
드롭박스(Dropbox)는 듀얼 트랙 설계가 정교하기로 잘 알려진 기업입니다. 이곳에서는 결과(Results), 방향(Direction), 인재(Talent), 문화(Culture)라는 네 가지 기둥으로 두 트랙을 동일하게 평가합니다.
IC는 기술적 통찰로 방향을 제시하고 시스템 개선으로 결과를 만들어내고, 관리자는 조직 운영과 문화 조성을 통해 같은 목표를 달성합니다. 도구와 방법이 다를 뿐, 조직에 기여하는 가치의 크기가 같다면 동일한 보상을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드롭박스의 커리어 프레임워크에 따르면, 많은 엔지니어에게 L4(시니어)가 ‘커리어 레벨’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부터 본인의 적성과 조직의 필요에 따라 트랙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죠.
메타: 6개월 수습 후 선택
메타(Meta)에서는 관리자 트랙으로 전환하기 전, 약 6개월간의 수습 기간을 거칩니다. 본인도 팀원도 이 역할이 맞는지 충분히 확인한 뒤에 정식으로 트랙을 전환하는 방식입니다.
더 인상적인 부분은 이 전환이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관리자로 몇 년간 일하다가도 다시 IC 트랙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흔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IC에서 관리자로의 이동이 ‘승진’이 아니라 ‘수평 이동’으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글: 관리자 없이도 임원급 대우
구글(Google)은 ‘Google Fellow’나 ‘Distinguished Engineer’ 같은 직책을 통해, 사람을 관리하지 않고도 임원급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경로를 제공합니다. 오직 기술적 전문성에만 집중하고 싶은 인재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는 구조입니다.
한국 조직에서 투 트랙, 가능할까요?
“그건 실리콘밸리 이야기 아닌가요?”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한국 조직에서 투 트랙을 도입하려면 몇 가지 허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첫 번째, ‘팀장 =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인식입니다. 한국의 많은 조직에서 팀 내 위계는 직책으로 결정됩니다. IC가 팀장과 동급이거나 더 높은 직급이라는 개념이 아직 낯선 곳이 많습니다.
두 번째, 보상 체계의 문제입니다. 제도를 만들어놔도 실질적인 연봉과 처우가 관리자 트랙에 편중되어 있으면, IC 트랙은 유명무실해집니다. 두 트랙 간의 보상 밴드와 직급 등가표를 사전에 공개하고 합의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세 번째, 전환의 자유도입니다. 한번 관리자가 되면 다시 실무로 돌아가는 것이 ‘강등’처럼 느껴지는 문화에서는, 투 트랙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결국 인식과 제도의 문제이지, 불가능의 영역은 아닙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센드버드 같은 글로벌 지향 스타트업들은 이미 듀얼 트랙 구조를 운영하고 있고, 대기업 중에서도 R&D 직군에 한해 전문가 트랙을 시범 운영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무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
조직 전체의 제도를 바꾸는 것이 당장은 어렵더라도, 리더로서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1. 팀원에게 물어보세요. “앞으로 사람을 관리하는 쪽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아니면 현재 업무의 전문성을 더 깊게 파고 싶은지.”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팀원의 커리어 방향성에 대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2. 승진 기준을 재정의하세요. ‘연차가 찼으니까’ 또는 ‘가장 실적이 좋으니까’가 아니라, 관리 역할에 필요한 역량(소통, 코칭, 갈등 중재, 전략 수립)을 별도로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하세요.
3. 전문가의 영향력을 가시화하세요. 기술 리뷰, 사내 세미나, 아키텍처 의사결정 등에서 IC의 기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평가와 보상에 반영하세요.
4. 수평 이동의 문화를 만드세요. 관리자에서 IC로 돌아가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리더가 먼저 이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조직은 ‘승진의 길’이 아니라 ‘성장의 길’을 다양하게 열어둡니다
결국 투 트랙의 본질은 제도 도입 그 자체보다, 인재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장에 있습니다. “관리자가 되는 것만이 성장의 증표”라는 전제를 내려놓을 때, 조직은 다채로운 리더십과 깊은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개발자가 굳이 팀장이 되지 않아도, 자신의 기술적 전문성으로 조직 전체에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면 — 그 사람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리에 진심인 사람이 그 역할을 맡을 때, 팀은 비로소 제대로 돌아갑니다.
“우리 조직에서 승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조직의 미래를 설계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